망원시장을 지날 때였다. 장갑 낀 손을 주머니에 숨기게 되는 날이었다. 몇 미터 앞 과일가게에서 귤 한 박스가 쓰러졌다. 아이고, 하는 새 한 발 늦었다. 떼구르르 굴러가는 귤을 주우러 사람들이 달려갔다. 귤 몇 알을 주워 담는 사람이 다섯 명이나 되었다. 노란 귤이 잠시 붐비다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빨개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무심히 떠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오랜 재택 근무가 끝나고 출근이 결정되었다. 가장 먼저 찾아본 게 지하철 혼잡도였다. 몇 시에 집을 나서야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을까. 웬만한 시간대엔 어림도 없었다. 출근이 인정되는 가장 빠른 시간, 8시까지 회사로 가는 게 그나마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요즘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난다. 따갑게 달라붙은 눈을 번쩍 뜬다. 얼른 씻고 출발한대도 자리에 앉을 수는 없다. 그저 사람들과 떨어져 설 수 있을 뿐이다. 그 조금이 절실해서 서두른다.
숨쉴 틈 없게 지하철에 밀려드는 사람들. 마스크 없이 연신 재채기를 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떠밀고 환승역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그들도 떨어진 귤을 주웠던 사람들, 누군가의 기억에 남은 장면을 만든 사람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귤 하나 떨어질 자리도 없는 데서 그걸 기억할 겨를이 없다. 내가 귤을 줍고 싶은 사람이었다는 것도 잊어버리는데.
오늘 출근길 지하철에도 사람이 많았다. 내일은 5분 더 일찍 알람을 맞췄다. 사람을 피하고 싶어서, 사람을 계속 좋아하고 싶어서.
우리들의 솜사탕
여름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오늘 레터도 반갑게 읽었어요. 읽으면서 지난 번 한 방송에서 오은영 박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학업 문제로 자신을 찾아오는데, 그러면 꼭 두 가지 질문을 한다고 해요. 첫 번째 질문은 "여러분의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중간고사 수학 시험 점수를 적어 보라"인데 (저도 그렇지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요. 두 번째 질문은 "학창 시절 시험을 앞두고 졸리면 눈을 비비고 허벅지를 때린 기억이 있느냐?"인데, 여기에는 모두 있다고 대답한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한 이야기가 "우리는 '아, 내가 열심히 살았어'라는 이 기억으로 살아가는 거지, 점수를 기억하고 살아가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이 기억을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번 레터를 읽고 왠지 그 기억이 떠올랐어요. 여름님이 꾸신 꿈이 수학 시험을 못 본 악몽이 아닌, 열심히 노력했던 순간이었기에 참 좋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새해 초에 좋은 꿈을 꾸셨네요! 여름님의 2025년 한 해가 노력하고 기뻤던 순간들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올해도 잘 부탁드려요!
- June
June님 안녕하세요! 전해주신 오은영 박사 이야기 참 좋네요ㅎㅎ 지난주에 솜사탕을 보내고 나서는 ‘너무 사소해서 까먹고 잊던 기억인데 굳이 쓴 걸까’ 생각하기도 했었는데요. 이번에 보내주신 답장으로 이야기가 모자람 없이 완성된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June님의 2025년에도 기쁜 순간이 가득하길 바랄게요. 저와, 솜사탕 친구분들과 나누고 싶은 순간을 만나신다면 언제든 알려주시고요 ☺️ 저도 올해도 잘 부탁드려요!
저랑 비슷해서 놀랐어요! 저는 수포자는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1학년때인가 어느 공부법 책을 보고 중학교 수학부터 다시 공부했거든요.. 사촌오빠한테 과외도 받고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했는데... 수능은 5등급... 그때 깨달았어요 해도 안되는게 있구나ㅎㅎ 언어와 외국어를 무난하게 받아서 다행이었지만.. 인생을 살면서 적당한 시기에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솜사탕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
- 민트
민트님! ‘수포자는 아니었지만’ 문장부터 밑줄 쳤어요ㅋㅋ 저도 단 한 순간도 수학을 포기한 적이 없었거든요. 수학이 저를 포기했을 뿐…
그렇지만! 하기 싫어서 처음부터 포기하는 거랑, 노력해봤지만 답이 없어 적당한 시기에 포기하는 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후자는 노력했다는 기억이 남으니까 럭키 포기라고 할까요🍀 소중한 경험 솜사탕에 나눠주셔서 감사하고, 올해도 잘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