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호선이 가까우면서 집 앞에 공원, 창 밖에 한강을 두려면 많은 걸 포기해야 한다. 작년 말에 이사온 우리 집은 올해로 20살. 리모델링의 호사도 누려본 적 없는 곳이다. 베란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고 옥상에선 환풍기 소리가 위잉위잉. 나무가 부풀고 문고리가 고장난 방문들은 제대로 닫히지 않는다. 월세를 이만큼 내고 여기 사는 게 잘하는 일인가, 장점과 단점을 자꾸만 수평저울에 재어 보게 된다. 공원에서 귀여운 강아지를 만날 때, 새로운 맛집을 발견할 때엔 천년만년 눌러앉고 싶다가도, 한두 달 지나면 어느새 이사 견적을 가늠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비둘기가 자꾸 그쪽에 앉아 똥을 싼다.
우리집은 옥상 바로 아랫층이다. 탑층이 덥고 춥다지만 층간소음을 오래 겪으니 윗층에 사람 없는 게 낫지 싶었다. 그랬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 옥상을 점령했을 줄이야. 비둘기. 아주 많은 비둘기. 해가 뜨면 옳다구나 모여 비정상회담을 시작하는 비둘기.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우리집 창밖 난간으로 내려오는 비둘기들. 프라이빗한 한강뷰 맛집이라고 소문이라도 난 걸까, 친구들 네다섯 마리씩 나란히 앉아 수다를 떨다 날아가곤 한다. 커플 비둘기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인기다. 신혼구구라고 이름붙여 준 커플은 다정하게 몸을 비비고 깃털을 골라 주며 여유를 즐긴다. 그래, 집을 짓고 알을 낳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떤가. 하지만 그들은 앉았던 자리에 언제나 똥을 남기고 간다.
자릿값 안 내는 것도 참아줬더니, 감히 똥을 싸? 인간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고 비둘기 퇴치를 시도한 적도 있다. 실패 사례가 많은 독수리 사진 붙이기는 고려하지도 않았다. FDA 승인을 받았다는 값비싼 퇴치제 뿌리기, 빛을 반사해 조류를 퇴치한다는 홀로그램 테이프 붙이기, 비둘기가 무서워한다는 맹금류 울음소리 틀어두기까지. 그들을 괴롭게 할 온갖 수를 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싸구려 포도향이 풍기는 거실에서 눈이 부신 건 인간뿐이었고, 비둘기들은 느긋이 앉아 맹금류 울음소리에 비트를 맞출 뿐이었다. 구루룩 구루룩. 난간에 앉지 못하게 뾰족뾰족 버드 스파이크를 설치하는 것도 알아봤는데 견적이 90만 원이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창문을 버럭 열고 소리를 지르는 것뿐.
비둘기는 똥을 싸고, 나는 고함을 지르고. 그렇게 서로의 일을 하며 휴전 상태에 들어가나 했다. 하지만 그들도 조용한 명당 자리를 되찾고 싶었나 보다. 한두 달에 한 번씩 우리집 창문에 게릴라성 비둘기똥을 투하한다.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질펀하게 묻은 설사를 보면 그들의 지능이 제법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덕분에 맑은 날만 좋아하던 내가 쏟아지는 비를 반기게 되었다. 이왕이면 거센 비가 내리치길, 창문과 난간의 비둘기 똥을 쓸어가주길. 얼마 전엔 도무지 비가 오지 않아서 15미터짜리 스프링호스를 샀다. 비둘기 때문에 산 것 중 이것만이 쓸모있었다. 제트모드에 물살을 맞추고 비둘기 똥에 대고 쏘았더니 대강은 떨어져나가고, 가까이 다가가야 보이는 투명한 점액질만 남았다. 깨끗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새파랗다. 세상은 아름답고 비둘기 정도는 대충 참아도 된다는 듯이.
하지만 비둘기는 곧 나타날 것이다. 창밖에는 곧 비둘기 똥이 쌓일 것이다. 비둘기 똥, 딱 그만큼의 무게가 오늘도 저울을 출렁이게 한다. |